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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암흑기 시대에 고창 판소리의 연구활동

고창 판소리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판소리문화의 초석을 놓은 것이 동리 신재효 선생이라면, 동리 신재효 선생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작품을 연구함으로서 동리와 고창의 판소리 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놓은 것은 새터 강한영 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동리 신재효 선생과 고창 판소리를 연구한 연구자들은 이기화선생을 포함하여 서종문, 정병헌, 김대행, 최동현 교수 등 유수한 대학의 여러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동리 신재효 선생과 고창 판소리에 관한 한 가장 선두에 서서 25년이 넘는 세월을 신재효 선생과 작품의 연구에 공력을 들였던 강한영 박사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다. 강한영 박사는 이들에게 길을 터주어 연구논문을 내놓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놓은 장본인이었다.

강한영 박사
그런데, 강한영 박사로 하여금 동리 신재효선생의 판소리 고전을 연구하도록 길을 이끈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이다. 알다시피, 시조시인이기도 한 이병기 선생은 해방이후 한국고전(韓國古典)문학 연구에 대들보와 같은 역할을 했던 분이다. 선생은 한국전쟁 이전, 서울대학교에서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전쟁 중에는 남쪽으로 내려와 전주의 명륜당에서 일시적으로 교편을 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전북대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하고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근대적인 학문적 역량을 갖춘 학자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가람 이병기 선생은 고전문학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국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서울대학교에 이어 전북대학교 국문학의 학문적 기풍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 판소리를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던 이기우, 김익두, 최동현 교수 등의 판소리 연구가들은 모두 이병기 선생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며, 필자가 국문과에서 수학할 때까지도 이병기 선생의 인격과 학풍에 대한 전설적인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강한영 박사 또한 이병기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강한영 박사가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할 때(1947-1951) 바로 이병기 선생이 서울대학교 국문과에서 교수로 교편(1946-1951)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강한영 박사는 전주(전북 완주군 이동면 서신리(새터), 지금은 전주시 서신동으로 편입됨)에서 출생했지만,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고창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터였다.

그러던 그에게, 신오위장(신재효 선생이 제수받은 실직) 선생의 신오위장본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신재효 선생의 문학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이병기 선생의 가르침은 박사에게 평생 신재효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이병기 선생이 강한영 박사에게 보낸 친필편지에는 문학연구의 어려움과 학문의 방법을 피력하면서도 제자를 격려하는 선생의 온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병기선생이 강한영 박사에게 쓴 편지(단기 4287년, 서기 1954년 3월 4일)
이병기 선생으로부터 학문적 깨달음을 얻은 강한영 박사는 고창을 다시 찾았다. 신재효 선생의 후손들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신재효 선생의 유품들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신재효 선생에 대한 경의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불탔던 강한영 박사는 신재효 선생의 집안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사는 신재효 선생의 증손자인 신기업씨의 딸 신옥선씨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강한영박사는 신씨가에서 간직하고 있었던 고문서와 고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재효 판소리본 성두본과 신씨가장본을 하나하나 연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신재효 선생의 후손들과 선생이 신재효판소리사설집 출간 신문 기사 (「 동아일보」, 1972. 3. 17.일자) 남긴 고서 및 고문서, 그리고 족보 등을 토대로 신재효 선생의 기념비를 발굴하는 한편 선생의 예술지향적인 삶을 재구성해 나갔다. 일일이 고문서와 고서를 주석했으며, 마침내 신재효 판소리 성두본과 신씨가장본을 주석하고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대략 25년 동안의 연구 끝에 강한영 박사는 그 동안의 연구작업을 총망라하는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全)(민중서관, 강한영 교주, 1971.)을 출간했고, 이것은 1984년 교문사에서 다시 출판 되었다. 이 전집을 내기 전에도 박사는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본을 각 바탕별로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고, 영인본으로 출간하기도 했으며, 신재효 선생에 대한 생애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신재효판소리사설집 출간 신문 기사(동아일보, 1972.03.17일자)
이와같이 강한영 박사가 길을 터놓자, 기다리기라도 하듯, 이 자료를 바탕으로 많은 학자들의 신재효 선생에 대한 연구와 논문이 이어졌다. 강한영 박사의 연구성과에 대한 반향은 단지 학자들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강한영 박사는 오랜 연구를 통해서,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 후원가로서, 이론가로서, 그리고 판소리 개작 및 창작자로서의 면모를 낱낱이 파헤쳤고, 여기에서 드러난 이와같은 신재효 선생의 면모는 많은 사람들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신재효 선생의 개작방향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설의 과다한 문학적 경향 등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후원가로서 또는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깡그리 부정할 수는 없었다.

판소리사에서 볼 때 일제강점기 말과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 무형문화재 제도와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까지는 판소리의 암흑기였다. 가장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던 기간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소리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냉담함과 무관심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는 묵묵히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 연구를 해냈다. 만약, 판소리사에서조차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이 고창 땅을 오롯이 불 밝히는 그의 연구가 없었다면, 고창의 판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긍심과 판소리문화는, 적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리국악당 시대의 개막과 고창 판소리

동리국악당 고창 판소리사에 있어서 동리국악당 시대의 개막은 과거 판소리 부흥기의 영화를 어느 정도 되살리면서 고창 판소리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고창에 동리국악당시대의 도래에 이르기까지는 여러가지 시대적 조건이 무르익어 있었다. 알다시피, 70년대부터 시작된 무형문화재제도와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있었던 일부 뜻있는 지식인들에 의하여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 문화재급 소리꾼들의 판소리 완창 발표회, 그리고 대학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문화운동의 파급 등 民· 官을 통틀어 민족문화는 시대적 패러다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 조건이 그러한들 불모지에서 판소리문화를 꽃피울 수는 없는 법이다. 다행히 고창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옛부터 전해 내려온, 동리 신재효라는 문화적 자산과 이를 연구하여 세상에 내놓은 연구자가 있었다.
행위전승을 본질적 특성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계승은 그 행위를 복원하고 재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 중심적인 장소로서 1990년 동리국악당이 건립되었고, 이를 운영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예능을 보급할 강사진이 꾸려졌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참으로 많은 고창출신 판소리명창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학자, 관계 공무원 등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러나 초기 동리국악당의 운영은 여러가지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고 한다.

이때, 최초로 동리국악당 판소리 강사를 맡게 된 조소녀· 조영자 명창 자매 중 언니 조소녀 명창은 당시의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허허벌판’으로 묘사했다. 그야말로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조소녀· 조영자 명창 자매가 고창에 강사로 오게 된 것은, 고창출신 명창 김소희선생과 강한영 박사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노라고 조명창은 말한다. 조명창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런데,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그동안 면면히 잠복하여 이어져온 판소리문화는 점차 많아져가는 수강생들로 부활해 나갔다. 조소녀 명창은 98년 정도까지 고창에 강사로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한다.

당시 대부분 수강생들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언제나 조명창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기운을 북돋아주었고, 수강생 중 어린 학생들은 판소리를 열심히 가르쳐 대학에 진학시킨 일도 많았다 한다.
조소녀 명창이 국악당 강사를 그만둘 때는 그동안 사제의 정을 나눴던 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놔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고창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으로 한 푼 두 푼 모아, 아산면 대기마을에 조소녀 판소리 수련원 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조소녀 명창이 떠난 후로는 동생 조영자 명창이, 조소녀 명창의 후학인 송미화와 함께 계속 자리를 지켜나갔다. 2003년에 이르러 조영자 명창이 13년간의 고창에서 활동을 접게되자, 보성소리의 맥을 잇고 있는 젊은 소리꾼 주소연씨가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활된 고창의 판소리 문화는 2001년 판소리박물관이 생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리국악당이 고창판소리 판소리의 여러 전통예능의 행위전승의 중심이라면, 박물관은 판소리 이론과 연구, 그리고 전시 및 교육활동의 중심으로서, 이론과 교육을 겸비했던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적 전통을 오롯이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다시, 그 동안 동리국악당 지하층을 전수실로 사용하면서 생겨났던 보급활동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2003년 동리국악당 뒤편에 전수관이 세워졌다. 이로서 이 일대는 국악당· 박물관· 전수관이 밀집되어 있는 판소리타운을 형성함으로서 판소리예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